게처럼 옆으로 걸었던 날이 있었다똑바로 걷지 못하였으므로 옆으로 걸어 앞으로 갔다모로 걸어도 갈 수 있다면 그만이었던 날이다사람이었을 때는 발이 두개였으나옆으로 걸었을 땐 많은 발이 필요했다두발로 지탱할 수 없던 날들이었으므로일주일에 한 번이면 새 양말을 신고사뿐히 쾌적하게 걸었을 내가며칠동안 하루를 걷듯이 지냈던 시간은세탁기 앞으로도 나아가지 못했다세탁기 안으로 웅크려 들어갔던 날엔어지러운 세상과 좁은 방에 숨이 막혔다옷감에는 세제를 넣어 빨래를 하는데사람에게는 무엇을 넣어야 하는가그런 하루를 걷기에 많은 발걸음이 필요했으므로세탁하면 필요없을 새 양말을 무더기로 샀다얼룩진 발을 한 번도 세탁한 적 없는 새 양말로 가렸다두발로 다시 똑바로 걸어갈 수 있게 되었을 때지난 날들을 세탁하는 데 꼬박 삼일이 걸..
물들어 가듯 하나둘 떠날 채비를 하는주홍빛 시간이 내려오면아무렇지 않게 올라오는 그리움이 있다 그 시간에 당신의 이름 석자는 신호등이 된다적색등과 녹색등이 동시에 켜지고주황색등이 쉼없이 깜박인다건너고 싶다가도 갈 수 없는 길머뭇거리는 나에게 경고하는내게만 있던 저녁이윽고 걸어 나가면 저녁은 깜박이고날아가던 철새도 멈춰서 나를 응시한다길이 아닌 곳에 있던 신호등인가푸른 밤이 넘실거리며눈꺼풀 위로 쏟아진다눈을 뜰 수 없어도자꾸만 보이는 저녁 노을당신의 부재가 쌓이는안온한 시간일수록 격랑이 찾아온다당신은 언제 밤이 되지
새벽 길은 음소거된 마음이명료한 고백을 외치는 걸음으로 분주하다희미한 불빛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전화번호를 누르지 않고 수화기를 들면잔류된 언어들이 제자리를 찾아온다이 시간 만큼은 표류된 고백을소홀히 외면하고 싶지 않으므로입술은 굳건히 닫고 귀를 연다나만 들을 수 있고 흘러나가지 않으니고백은 오늘도 일기가 되겠구나요란하게 고요함이 축적되면멈춰서 있던 만큼의 시간을 더 살게 된다신호음이 심장의 맥박소리와주파수를 맞출 때 즈음 수화기를 닫으며그곳에 고여있던 나를 놓고 온다주머니속 반창고를 손등에 붙이며두고온 나에게 안녕, 손짓 해본다이토록 요란한 새벽에 걷고 걷다보면바람의 숨결은 명백하고 달빛은 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