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무성히 자라난 풀들이 녹색빛 파도로 바람에 일렁일 때 잘라내야 한다 질긴 줄기들이 칼을 감싸면 푸른 멍들을 떠올리며 잘라낸다 내일이면, 아니 오늘 저녁이면 어김없이 풀은 자라날 것이므로 칼을 놓지말아야 한다 나를 자르고 뜯어내고 베어야 한다 불안은 계속 자라나므로 슬픔은 뿌리가 깊으므로
너와 나의 토마토를 저울에 올리면 기울어짐을 안다 어느 한쪽이 썩어서는 아니며 어느 한쪽이 더 신선해서도 아니다 사랑이 기울어진 마음이라고 했을때 나는 수평을 그리워하는 사람 모든 마음이 너에게로 향하면 비어있는 반대편이 공허해 채워지지 않는 여백을 미워했네 기울어진 세상을 똑바로 걸어가려면 조금 덜 사랑해야 하는 건지 네가 그만큼 더 사랑하길 바라야 하는지 불균형적인 마음은 계속 미끄러지고 있지 더 커다란 토마토를 향해
흰색은 너무 말끔해서 아무것도 아프지 않은 것 같아서 내 손길이 첫 얼룩이 될 것 같아서 검은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지 듬성듬성 틈이 생기는 색칠은 자주 후회하는 시간들 같아서 지난 곳들을 다시 메꾸다 보면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닳아져버려서 빈 곳이 자주 추웠지 검은 도화지에 검정은 필요없으니 희망들로만 색을 칠했지 모든 색들이 기도 같아서 밤에도 무지개가 아른거렸지 내 모든 소망이 그렇게 그려졌지
옅은 심장박동으로 깜빡이는 가로등 한 모금 먹다 남긴 김빠진 맥주캔 뭉툭한 연필로 굵게 쓰인 첫마디 먹구름 뒤로 선명한 달의 뒷면 뿌리가 깨부순 화분의 밑바닥 아무리 봐도 그건 사랑인데 엎지르고 주워 담지 못한 어떻게 봐도 그건 사랑인데 쓸어 담아도 새어 나오고야 마는
아버지의 굵은 기침 종처럼 울려 우리를 지키는 소리 어머니의 부딪히는 밥그릇 따뜻한 아침을 만드는 소리 누나의 아기를 달래는 품 평온한 하루를 안겨주는 소리 오늘을 만드는 소리가 분주한 데 나는 무슨 소리를 내고 있나요 반쯤 잠긴 눈으로 그들의 뒤를 보는 나의 소리는 요란하게 침묵합니다
어느 서점 시 코너에서 무릎을 꿇고 시집을 고르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몇마디 인생을 읽으려 낮은 자세로 시를 고르는지 당신이 제 시를 읽어준다면 잔뼈가 무성한 제 삶에 새살이 돋아날 것만 같았습니다
무더운 햇볕 아래 논은 황금빛 들판으로 일제히 바람과 안녕을 합니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무거운 고개를 숙여 아직 오지 않은 가을에게 묵례를 올립니다 나는 논밭으로 들어가 차렷 자세로 몸을 심어 고개를 숙입니다 가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더 자라야 하겠습니다
고향에 가면 드넓은 밭을 일군다 당신의 주름은 점점 깊어지는데 무엇을 일궈낸 삶일까 타작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나는 도랑에 빠져 따뜻한 그늘에 있고 비옥한 마음을 양분삼아 이렇게 자랐다 여전히 당신의 품이 아련하다 타작하는 소리가 스며든다 주름진 마음에 깊숙이 심어보자는 일념 손이 닿지않는 곳에 물을 준다 나는 무엇을 일궈낼 수 있을까 타작하는 소리가 뺨을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