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책 그만 봐야겠다. 진짜 마음고생 심한가 보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없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잠 충분히 자고 운동도 조금씩이라도 하면서 살아. 다 좋아하면서 살 수는 없어. 원래 다 그렇게 살게 되는 게 세상이야.최근에 친구들을 만나고, 직장 동료와 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다. 나는 단 한 마디도 지인들의 조언에 반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히 맞을지 모르겠지만, 이성적으로는 그 말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던 나였으니 안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특별한 안좋은 상황이 있었다거나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달고 다니던 걱정과 불안이 다시 조금 더 커졌던 것 뿐이다.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
끈이 있는 신발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처음 끈신발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저 벨크로 신발보다 이쁘고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습만 한다면 얼마든지 멋있는 매듭을 지어볼 수 있었다. 신발은 같아도 끈을 다채롭게 바꿔보며 멋을 더해볼 수 있었다. 그런 신발이 어설프게 매듭을 묶어 자주 풀리거나 느슨해져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언제든 다시 고쳐 매면 되니까.어떤 신발은 처음 살 때부터 같이 온 끈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길어서 불필요한 매듭을 몇번이고 더 묶어야 적당한 길이로 맺어 떨어졌다. 신발을 반품하고 바꾸기에는 귀찮고, 끈만 바꾸자니 신발에 맞는 색과 길이의 끈을 찾아다니는 것은 더 고역이다.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긴 끈을 주렁주렁 열매처럼 매듭을 묶어 신고 다니기도 했다. 그것조차 거추장스러울 때는 신발 안쪽..
내가 살면서 크게 자랑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내 삶에 대해 적어도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고 싶다. 떳떳하다고, 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지 않아도 보여지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사람이길 원한다.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뒤쳐지지 않는 건, 성실함이었다. 시골에서 도시 생활을 꿈꾸는 나는 성실하게 공부했다. 그렇다고 성실함이 덧셈과 곱셈처럼 정직하고 단순하게 내일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원하던 대학을 떨어지고 재수를 했다. 재수를 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수를 하지 않고 성적에 맞춰 어떤 곳을 간다는 것은 내가 굳게 믿던 성실이 나를 격렬히 부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재수를 위해 처..
내가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세 번째 회사를 다니면서 알 수 있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에게, 마음에게 너무나도 여리고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어쩌면 더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태생적인 것이니까. 누가 나에게 알려주지 않는, 가르쳐주지 않은 살면서 가지고 있던 원초적 본능 같은 거니까. 바꾸기 힘든 것을 바꾸려고 하는 건 어린아이건 어른이건 똑같이 힘든 일이다. 다만 그 태생적인 것을 온전히 부정하거나, 받아들이거나, 바꾸어 보려고 하거나, 그 태도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무엇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사람을 향해 이분법적으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처럼. 정답은 없지만 해답은 있다고 믿는다. 문제집을 풀면 정답을 맞춰야 하고,..
당신과 괜찮을 수 있는 안녕을 했다. 아마도 괜찮은 건 당신이고 괜찮을 수 있고 괜찮아야 하는 건 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힘겹게 얘기를 꺼낸 것이다. 끝끝내 이 결심이 후회가 될지, 미련이 될지, 다행이 될지 나에게는 알 수 없었다.어떤 이유로 얘기를 하게 된 건지 생각하기 싫었다. 엎질러진 물을 잘 닦아내고 말리는 것만이 내가 잘 해야하는 일이 된 것이다. 어렴풋이 알았다는 당신의 말이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과 헤어지고 몰려온 혼자 맞이하는 새벽이 괜찮을 수 있냐고, 그 동안의 마음과 시간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냐고 되물었다.위로는 모르겠지만 막연히 언젠가는 힘이 되지 않겠냐며 스스로에게 다그쳤던 밤이다. 먼 미래에는 그게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몰래 반창고를 붙이며 천천히 아물고 ..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고,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순환의 힘을 믿습니다. 믿고 싶을 때가 많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 오는 것. 꽃이 피면 지고 다시 피는 것.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순환한다는 것은 마지막이라는 어떠한 종결의 의미보다 연결과 재생이라는 의미로서 살아가게 합니다.당신에게 시작과 끝은 어떤 의미가 될까요. 저는 순환하면서 동시에 나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자리인 삶 보다는 다른 마음과 다른 풍경, 어쩌면 다르다는 건 경험해보지 못한 색다른, 새로움의 의미로서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저에게 끝이란 두렵고 무서움으로 다가와서, 맹목적으로 순환과 연결을 믿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당신을 알게 된지 벌써 4년이 넘었습..
태어난 모든 것들은 끝이 있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끝에 도달하기 전에 끊어지다가도 이어짐을 반복한다. 깔끔하게 잘린 것들은 대체로 가장 예리한 날에 베여 미련이 없어 보인다. 막무가내의 힘으로 끊어진 또 어떤 것들은 거칠은 단면을 드러내며 서러워 한다.연필깎기로 돌려 예리하고 반듯하게 잘린 몽당연필. 구멍난 옷감을 덮기 위해 바늘구멍 속 좁은세상을 돌파해야 하는 잘린 실. 체하지 않고 잘 소화시키기 위해 작아지는 식재료들. 깨지면 이어붙여도 물이 새어 나오고야 마는 유리병. 불규칙적인 모양으로 잘게 부스러져 다시 모이지 않는 과자 부스러기.나는 끊어진 것들의 본래 이어지거나 합쳐진 과거의 모습들을 상상한다. 제를 지낸다. 통곡하지 않는다. 소리 내지 않는다. 그저 깨지고 잘리고 부서져야 했을 마음을 이..
매일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풀들이 내 몸에서 자라난다. 잠을 자고 있으면 온몸에 씨앗이 심어지고, 밤의 달빛과 잡념을 영양분으로 삼아 자라난다. 대체로 아침에 눈을 뜨면 새싹으로 시작하지만, 어떤 날에는 풀숲에 둘러싸여 일어나곤 한다. 이름 따위는 붙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잡초라고 부르기는 싫었다. 내 몸과 마음에서 매일 자라는 것이니, 무성의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이 많을 때면 풀이 더 빠르게, 무성하게 자란다. 심할 때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주, 몸과 마음 구석구석 자라난 풀들을 자르고 베어낸다. 가위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단장하듯 자를 때도 있고, 면도기로 뿌리까지 자르는 심정으로 밀어 버리기도 한다. 씨앗을 뽑아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극심할 때는 밥을 먹지 않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