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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모든 것들은 끝이 있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끝에 도달하기 전에 끊어지다가도 이어짐을 반복한다. 깔끔하게 잘린 것들은 대체로 가장 예리한 날에 베여 미련이 없어 보인다. 막무가내의 힘으로 끊어진 또 어떤 것들은 거칠은 단면을 드러내며 서러워 한다.
연필깎기로 돌려 예리하고 반듯하게 잘린 몽당연필. 구멍난 옷감을 덮기 위해 바늘구멍 속 좁은세상을 돌파해야 하는 잘린 실. 체하지 않고 잘 소화시키기 위해 작아지는 식재료들. 깨지면 이어붙여도 물이 새어 나오고야 마는 유리병. 불규칙적인 모양으로 잘게 부스러져 다시 모이지 않는 과자 부스러기.
나는 끊어진 것들의 본래 이어지거나 합쳐진 과거의 모습들을 상상한다. 제를 지낸다. 통곡하지 않는다. 소리 내지 않는다. 그저 깨지고 잘리고 부서져야 했을 마음을 이해하려 애써보는 일 뿐이다.
단면을 어루만지면 반듯하고 정갈한 것들은 차가웠고, 울퉁불퉁한 것들은 부드러웠으며, 거친 것들은 손끝의 지문과 잘 맞아서 레코드판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듯 무언가 울려퍼졌다. 다시 이어지고 하나가 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알고 있어도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곤 한다.
다시 이어질 수 있는 것들은 필사적으로 매듭을 지었다. 다시 멀쩡한 옷이 되려면 풀리지 않게 실의 끄트머리로 매듭을 짓는다. 항구에 정박한 배와 이별하지 않으려면 밧줄로 단단히 매듭을 지어 붙잡아야 한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올려 흐트러지지 않는 자신이 되기 위해 묶기도 한다.
매듭을 묶지 않아도 우리는 악수와 포옹으로 잠시 매듭을 짓다가도 다시 풀어 헤치곤 한다. 어떤 날은 오랫동안 매듭을 풀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나의 끊어진 곳의 단면은 매끄러울까, 거칠고 투박할까.
하루하루를 누군가와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 또는 같은 순간을 보내면서 점점 많은 매듭을 묶고 풀기를 반복하고 있다. 기대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느슨한 묶음을 통해 언제든 슬그머니 풀어 나온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매듭이 단단하고 두꺼워 쉽게 풀지 못하곤 한다. 대체로 내가 먼저 묶은 것들이지만, 먼저 풀어 헤치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어떤 매듭은 너무 강하게 묶어서, 풀고 싶어도 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풀고 싶냐고 되뇌이며 물으면 아니라고 속삭일 때가 많다.
일방적인 매듭은 풀리기도 전에 또 다른 면이 잘려 도마뱀의 꼬리처럼 남겨지기도 한다. 내가 스스로 쉽게 풀 수 없는 것들은 하나둘 발끝에 채이다가도, 쌓여가면서 언덕이 되고, 산이 되어 내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그래서 상처받기 싫어서 먼저 끈을 풀어 건네지 않기도 한다. 언젠가 나는 또 매듭을 지으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 매듭을 끊으려고 할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매듭을 용기내어 단단히 묶고, 넘어가려고 한 적도 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우리는 대체로 글이나 문자, 말과 목소리로 연결된다. 나는 뜬금없이, 암묵적인 끝맺음도 없이 단절되는 것을 싫어한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려운 것이다. 예기치 못한 끝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가 그 정도의 사람이라고 단정 짓게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매일 매 순간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필요할 때만 찾는, 그런 관계로서 존재하고 싶지는 않다.
쉽게 떼고 붙일 수 있는 얇은 인덱스 포스트잇이나 쪽지보다, 언젠가, 아니 다음에도 다시 읽고 싶은 구절을 품은 사람이라서 책갈피 같기를 지향한다. 단편적이고 일회성의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의 구석에라도 심어져 함께 시간을 빚어 자라나고 싶은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내가 아무 이유도 알 수 없이, 때로는 납득할 수 없이 단절된 면을 만지게 될 때면   자신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하며 잘라내지 못하게 된다.

누군가는 삶은, 사람은 다양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라고 한다. 나의 잘린 단면을 보다가도, 상대방의 단면을 보며 머릿속으로 이어붙이고 맞대어 보는 상상을 해본다. 이러한 것들은 너무 경직되고 단단해서 끈처럼 매듭을 다시 지어보려고 해도 많은 힘이 필요로 한다.
결국 내가 포기하고 반드시 어떻게든 납득을 함으로써 견디고 지나가야 할 때가 많다. 그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운 길이 되고, 가장 아프면서도 가장 덤덤해질 수 있는 방법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너는, 우리는 각자의 단면을 쓸쓸히 쓰다듬으며 이 아픔을 외면하고 무뎌지며 품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고 싶지는 않다. 평생 닿지 못할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어 피는 해바라기보다, 서로가 덩굴이 되어 맞잡고, 때로는 뒤섞이며 나아가고 싶다.
나는 누군가에게 풀고 싶지 않은 관계가, 사람이, 매듭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있을까.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일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회의감은 제일 커다란 매듭을 가지고 있다.

정현주 작가의 '그래도, 사랑' 책에서 읽은 저자의 말이 내 사방에 쌓인 매듭들을 돌아보게 했다.

"사랑을 두려워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주춤거리고 물러서고 확신이 더 또렷해질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리던 날도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사랑을 보지 않고 사랑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내 안의 상처만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길고 어둡던 터널이 끝났습니다. 가장 간절했던 생각은 '그래도 사랑하길 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작년까지는 극심하게도 나를 부정하고 사랑하지 못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도무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무서웠다. 언젠가는 어떻게된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그 작은 시간조차도 내게는 또 다른 매듭일 것이니까.

그래서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회피하였고, 그 사랑의 얼룩진 씨앗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찾으려 애쓰면서 나를 바라보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랑을 하면, 누군가와 만남을 가지면, 연결이 되면, 접속이 되면 아픈 단면들이 있을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고 반대로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행복마저 바라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별거 아닌 이유로 나와의 대화를 끊어버리거나, 어딘가로 사라지거나,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그 어떤 것보다도 스스로가 아픔을 가져와 품는다. 오늘도, 어제도 그랬듯이. 나는 아직도 끊어진 것들에 대해 덤덤할 수 없다. (어쩌면 앞으로도 더 성숙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프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오로지 내가 괜찮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내가 더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닐까. 아픔을 아프지 않다고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들리는 외침 한 마디가 끊임없이 메아리 치고 있다.

매듭의 언덕을 넘어 가보자고.
다시 이어 붙일 수 없게 되더라도 한 걸음 먼저 다가가 보자고.
나는 수 많은 매듭을 지어오고, 끊어지기를 반복해 오고 있지만
그래서 누군가의 단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반드시, 나의 단면을 바라봐줄 누군가가
매듭을 지으러 올 것이라고.
그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나도 매듭을 지으러 가야 한다고.

물집이 가득 잡힌 발로 매듭의 언덕을 걸어간다.
손톱이 부러진 손으로 덩굴을 잡아 오른다.
언덕을 넘으면 시원한 바람이 머릿결을 쓸어 넘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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