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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책 그만 봐야겠다. 진짜 마음고생 심한가 보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없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잠 충분히 자고 운동도 조금씩이라도 하면서 살아. 다 좋아하면서 살 수는 없어. 원래 다 그렇게 살게 되는 게 세상이야.

최근에 친구들을 만나고, 직장 동료와 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다. 나는 단 한 마디도 지인들의 조언에 반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히 맞을지 모르겠지만, 이성적으로는 그 말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던 나였으니 안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특별한 안좋은 상황이 있었다거나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달고 다니던 걱정과 불안이 다시 조금 더 커졌던 것 뿐이다.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 불안은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나만이 풀어내야 하는 숙제라는 것을 말이다. 동시에 누구나 최소 한 번 쯤은 가져볼 만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걱정과 불안을 가지고 있어봤을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풀어나갔는지를 자주 기회가 되면 물어보았다. 사실은 답을 알고 있고 원인도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창피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걱정해주는 것이나 조언해주는 마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 그랬다. 좀 더 깊숙이 생각해본다면, 나에게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불안의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지만, 그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몹시도 많은 질문과 궁금증과 회의감이 많이 들었다. 그 실타래들을 허겁지겁 풀려고 손을 대면 더 복잡하게 뒤엉키고 진전은 없었다. 그래서 같이 풀어줄 손길을 구하러 다녔는지도 모른다.

빈곤과 가난, 전쟁과 폭력, 기후변화 등 내 눈과 귀가 닿는 다양한 매체들에서는 안좋고 자극적인 뉴스와 기사거리로 가득했다. 원래 사람이란 자극적이고 부정한 것에 더 이목이 끌리기 마련이지만, 너무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좋은 것을 찾아 바라보고 느끼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 좋은 것들을 함께 나누는 것 마저도 바쁘고 힘이 드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매스미디어에 빼곡하게 가득 차고 흘러나온다는 것들이 고작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누군가가 아프고, 고독해지는, 그런 세상이라는 소식이라니. 한 동안 뉴스 기사를 보지 않았다. 회파라고 하면 회피이자 도피이겠지만, 그 역시도 쉽게 하지 못할 정도로 매일매일 주변에선 좋지 않은 소식들로 가득찼다.

그래도 그 중간중간에 지인들의 결혼 소식이나, 가족들이 별탈 없이 지내고 있다는 소식은 담백하면서도 한줄기 희망 같은 뉴스였다. 한편으로는 나도 그런 희망같은 소식들을 경험하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사 마음대로 다 되는 법은 없는 거라고. 조금 더 노력했던 부분들에서 그 만큼의 좋은 소식이 내게 오지는 않았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생각은, 선조들이 만든 사자성어인 '설상가상'이 정말 잘 만든 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균형을 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일까. 행복은 얘기치 않게 찾아오면서 과분하다 느낄 만큼 들어오기도 하고, 반며에 좋지 않은 순간들도 엎치고 덮치는 것처럼 몰아서 들어오는 삶이다.

현명한 사람은 어두울 때 어떻게 살아가는 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는데, 어두운 날들이 더 많다고 생각되는 요즘이다. 그렇다면 나는 계속 시험에 들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정답이 있으면 좋겠다. 나의 걱정과 불안에 사람들이 말해주는 답은 충분한 수면과 운동이었다. 동의한다. 충분한 잠을 잔 뒤에 컨디션은 괜찮아서 좋지 않은 생각들이 쉽게 마음에 들어오지 못했고, 땀이 나도록 운동을 하면 금세 기분이 괜찮아진다.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계속 밀려오는 불안과 걱정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잠과 운동으로 이겨내야만 하는 것인가. 친구들에게 물었을 때 모두가 답을 하지 못했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그런게 세상이라면 말이다. 적어도 나는 내가 사는 삶, 세상에서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최소한 나의 선택과 결과에 대해 스스로를 부정하고 후회하는 일들은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너는 지금까지 최고의 선택들을 해오고 있었어? 아니, 나는 그렇지 않아. 언제나 최고의, 최선의 선택을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없는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짐작할 수도 없는 아픔을 가진 친구가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아프면 병원에 가고 약국에서 약을 받으며 건강해질 수 있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결국 내가 진찰하고 치료해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내 삶이 주체적이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 같다고 느끼는 요즘,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물었을 때 단 한 번도 그런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 물음에 대해 내가 당시에 결론을 지었던 행복은,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 때 행복하다는 것이다.

공모전에서 상을 타거나,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행복이 아닌, 그런 것들이 없어도 나라서 좋다라는 행복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스스로를 충분히 돌보고 사랑하지 못해서 여기저기 흉터가 생기고 망가진 몸과 마음을 처음부터 되돌리고 싶다, 더 나아가서는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해졌다.

그렇다고 게임을 로그아웃하고 새롭게 로그인해서 새 게임을 하는 것처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그것이 내게는 슬펐다. 만들고 망그뜨리고 새롭게 만드는 지점토처럼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의 크고 작은 선택과 언행들이 탑처러 쌓여 내 삶들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무너뜨려야만 하는지, 그럴 수 있는지 고민했다.

만약에 온전히 나를 무너뜨리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때의 나는 어떤 나일까. 30년이 넘는 벽돌들을 다시 쌓는다는 것은 얼마나 오래걸리고 힘이 들 수 있을까. 온전히 무너뜨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주변에서 말을 해줄 때면, 에전 같았으면 바로 큰 위안이 되었겠지만, 이제는 큰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은 명쾌했다.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되어보면 되잖아. 지금부터라도.

문제집은 답을 명쾌히 알고 있다면 복잡한 풀이를 거칠 필요 없이 답을 제출하면 될 것이다. 해설지도 필요 없다면, 두툼한 해설지를 가방에서 빼내어 조금 더 가볍게 삻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인생은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더 두껍고 새로운 해설지를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인생에 문제는 끝지 없는 것일까. 철학자들에게도 문제의 끝이 있었을까. 끝이 있었다면 인생은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퇴근 후 시장골목을 지나면서 저녁거리가 없고, 내일 점심에 먹을 도시락 메뉴가 마땅히 없다고 생각이 되었을 ㄸ애 동네 반찬가게가 보였다. 가게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반찬들을 골라서 샀다. 제일 좋아하는 것부터, 자주 챙겨먹지 않았지만 건강해지기 위해서 애써 고른 반찬도 있었고, 어떤 것들은 집밥의 느낌을 경험하고 싶어서 산 것들도 있었다.

그날 저녁, 가게에서 산 도토리묵을 밥없이 꺼내 먹었다. 복잡한 생각의 실타래 때문에 식욕이 없기도 했지만, 따뜻하고 정감있는 집밥은 사무치게 그리웠나보다. 젓가락으로 물렁하고 말랑한 도토리묵을 집어드려고 했다. 생각보다 미끄러워서 도토리묵의 둥글게 네모난 모양을 깨지 않고 온전하게 집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냥 콕 젓가락으로 쑤셔서 조심히 들어 집어먹어도 아무 문제 없이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온전하게 상처가 없는 말끔한 도토리묵을 먹고 싶었다. 야근을 하고 돌아와 홀로 집에서 수차례 도토리묵을 먹기위해 젓가락질을 했지만 피곤해서였는지 계속 실패했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눈물이 났다. 계속 시도한 젓가락질로 아픈 내 손과는 반대로 도토리묵은 멀쩡해서 야속하기도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조금 도토리묵이 수분기가 사라져 집기 편해질 즈음에야 겨우 한 입 먹을 수 있었다.
도토리묵은 내가 늘 알고 있던 그 맛이었지만, 내가 바라던 맛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회용 접시 위에 놓인 말라붙은 도토리묵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거야? 오늘은 무엇을 기대했고, 내일은 무엇을 기대해? 오늘 난 무엇을 해냈고, 내일은 무엇을 해낼 수 있는 거야? 나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사람은, 삶은 연속적인 거야? 지금까지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것들은 어떻게 해야해?

까무잡잡한 도토리묵은 더 이상 물렁하지 않다. 나 또한 물렁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괜히 젓가락으로 도토리묵을 이리저리 찔러본다. 억지로 젓가락으로 갈라놓지 않는 이상, 푹푹 찔린 도토리묵의 모양은 일정했다. 그래, 나는 도토리묵이구나. 여기저기 찔리고 찔렸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모양을 유지하고 있구나.

SNS와 책에서 매사에 너무 많은 고민을 깊이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일에서도 인간 관계에서도, 미래에서도, 꿈에서도.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끝없는 불안과 걱정을 만들게 하는 건 인간으로서 필수적인 생존본능입니까. 위기의식으로 기회를 잡으며 살아가야 하는 숙명인 겁니까. 신을 믿지 않으니 답을 들을 수 없는 건 당연한 것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고,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중 한 친구는 자신도 몇년 전에 같은 고민을 하며 밤을 보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공감이 되고 이해가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친구가 지하철에서 헤어질 때, 지하철 문이 닫혀 보이지 않을 떄까지 밖에 나가지 않고 나를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나 고마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다지도 수수하면서도 깊은 것이구나.

다음 날 냉장고에서 남은 도토리묵을 꺼내어 먹었다. 젓가락이 아닌 숟가락으로 떠서 쉽게 먹었다. 같은 도토리묵인데 한 번에 힘들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맛은 똑같았지만 그 맛을 느끼기 위해 한 내 시간과 행동은 달랐다.

지금도 나는 어떠한 해설지들을 가지고 와서도 답을 명쾌하게 써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인데, 왜 내가 조금 더 편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남에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해져야 하는 것일까. 왜 계속 나는 스스로를 다그치고 엄격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안 좋은 소식이 가득한 세상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걱정과 불안이 나에게 어둑한 에너지가 아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는 없을까.

지인들이 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도 별 수 있나. 답을 알면서도 써서 내지 못한다면, 이것저것 다 해보는 수 밖에. 도토리묵을 젓가락이 아닌 숟가락으로 먹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처럼. 나도 내가 납득할 만한 무언가를 찾을 때까지 무엇이든 괜찮다는 것은 해보는 것이 가장 내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언젠가는 한 번에 젓가락으로 모양을 깨뜨리지 않고 온전한 도토리묵을 간편히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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