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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면서 크게 자랑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내 삶에 대해 적어도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고 싶다. 떳떳하다고, 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지 않아도 보여지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사람이길 원한다.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뒤쳐지지 않는 건, 성실함이었다. 시골에서 도시 생활을 꿈꾸는 나는 성실하게 공부했다. 그렇다고 성실함이 덧셈과 곱셈처럼 정직하고 단순하게 내일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원하던 대학을 떨어지고 재수를 했다. 재수를 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수를 하지 않고 성적에 맞춰 어떤 곳을 간다는 것은 내가 굳게 믿던 성실이 나를 격렬히 부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재수를 위해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 누나와 자취를 하면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한시간이 걸리는 학원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공부를 했다. 집에 돌아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줄넘기와 운동을 한시간씨 하고 잠에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공부하며 지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몸이 좋지 않아도 공부를 했고, 성적이 쉽게 오르지 않을 때면 너무나도 괴로웠던 일년. 그래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부모님이 아들 밥 한 번 먹이겠다고 서울에 올라오셨던 날이었다.

엄마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서울이 무서워 지하철을 타고 내리고 길을 걸을 때도 꽉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으셨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밥을 먹는 그 날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 날밤, 자취방 옥상에서 아빠와 바람을 쐬며 야경을 보고 있었다.

한 번도 내게 집안 사정과 돈에 대해 얘기를 꺼낸 적이 없으셨던 당신이 처음으로 재수학원에 들어가는 돈이 비싸 힘들다는 말을 하셨다.
그래서 열심히 해서 꿈을 이루라고 하셨다. 당신의 투박하고 굳은살이 깊게 박힌 손바닥을 보여주면서. 당신의 손바닥은 100년을 넘도록 마을 한가운데를 지킨 느티나무의 기둥보다 굳건했고, 폭포를 수백년 견딘 바위보다도 든든하고 단단해보였다.

그 날밤 이후로, 힘이 들때면 아빠의 손바닥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 손바닥을 본다. 아직 굳은살이 박히지 않은 나의 손바닥은 때로는 부끄럽다. 아직 나는 더 삶을 위해 진정으로 살고 싶어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나를 위해서도 열심히 더 살지 못한 것 같아서. 나를 위한 것 같지 않아서.

덕분에 많이는 아니지만 서울의 대학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을 높여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놀기도 열심히 놀았지만 공부를 해야 할 때는 공부를 했다. 그래도 대학교 1학년일 때,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나는 부모님의 권유와 현실 때문에 경영학과로 지원을 했고, 그 회의감에 방황을 했다. 그래서 비싼 장학금을 받고 다니던 거시 끊길 뻔한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공부를 가지고 아빠에게 혼이 났다. 햇살이 따갑던 여름방학, 일주일을 고향에 내려와 고추밭에서 고추를 땄다. 햇살이 너무나도 아픈 일주일이었다. 성실함이 직선처럼 원하는대로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적어도 성실하지 않으면 그 결과를 기대할 자격도, 이유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던 날. 그리고 당신의 손바닥을 볼 면목이 없어 하염없이 내 손바닥의 무른 살만 바라봤던 날.

그 뒤로 다시 내 삶에 부끄럽지 않고 싶어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결과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하게 되더라도, 열심히 하고나서 미련을 가지고 후회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군대를 가서도 굳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열심히 했다. 대학 1학년 때 방황했던 나를 위해 군대에서도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고, 80여권의 책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면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렇다고 학점이 좋지는 않았다. 후회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열심히 살았으니까. 학점이 내 꿈을 위해 어떤 초석과 디딤돌이 될 수는 있어도 그것 없이도 꿈을 이루는 데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길은 하나가 아니니까.

당연하게도 성실하다는 것이 꼭 행복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첫 회사생활, 너무 열심히 하는 건 꼭 그만큼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일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우여곡절도 많았고 힘든 날도 많았다. 그렇다고 모든 날이 힘든 건 아니었지만, 대체로 기억나는 건 좋지 않은 추억들 뿐이다.

첫 회사를 퇴사하기로 결심한 때에, 팀장님과 여덟번의 면담을 했다. 사수였던 과장님은 길게 쉬다 와도 괜찮다며, 감사하게도 사람들이 나를 붙잡아주었다. 퇴사를 결심한 뒤에 마지막을 정리하던 날들에, 함께 일을 했던 타 부서 상사분들도 밥을 사주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씀해주셨다.

동기들 중에서 가장 늦게 퇴사를 할 줄 알았던 내가 가장 먼저 퇴사를 하면서, 동기들의 아쉬워하는 마음을 볼 수 있을 때에도 고맙고 행복했다. 퇴사를 하고 더이상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 오후, 봄이었던 날, 산책을 하다 공원 한복판에서 울었던 적이 있었다.

매일 새벽까지 일하고, 죽을 것만 같아서 살아야 하니까 밤에 밥을 먹다보니 몸무게도 20kg 넘게 찌고, 하루하루가 스트레스로 가득했던 날을 보냈던 내게, 따사로운 봄햇살과 화창하고 따스한 봄바람이 너무 안온해서 아팠다.
나는 무엇을 바라며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일만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혀 왔는지. 그 누구도 내게 그렇게 하라고, 그렇게 살라고 한 적이 없었기에 나의 온전한 선택과, 성실함의 아픔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보면서 몇개월이 자나자 나는 나태해지고 있었다. 다시 좋은 곳에 취업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과, 점점 떨어져 가는 돈에 대한 불안감이 어느새 행복하던 내 주위를 맴돌았다. 모순적이게도 불안할수록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괴로움에 움직일 수 없었다.

감사하게도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다. 뭐든지 새롭게 시작하는 건, 특히나 그것이 일이 될 때는 옆을 보지 못하고 몰두하게 되는 것 같다. 삶의 진짜 행복은 쉽게 오지 않는 법이라고 하던데, 열심히 일을 하고 받게 되는 결과물들은 너무나도 직관적이고 자극적이어서 그것에 매료되는 듯한 날들을 보냈다.

당시에 나는 사회초년생이기 때문에, 나의 커리어를 쌓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몇번의 번아웃이 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했다. 첫 회사생활에서도 번아웃이 왔기 때문에, 여기선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지만, 나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사는 것 같지 않은 성격이라서, 같은 역사를 반복하는 듯 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도 이 힘듦을 쉽게 애기하지 못하고 계속 홀로 구덩이를 파며 불안과 고독속으로 들어가는 회사생활을 보냈다. 누구의 선택도 아닌, 나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때면 손바닥이 쓰라렸다. 아직 굳은살이 박히지 않았는데 삶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하루 빨리 굳은살이 박히기를 바랐다. 마치 어린아이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것처럼. 홀로 마음속으로 떼를 썼다.

어쩌다보니 일만 하면서 피곤하고 힘들어서 친구들 약속도 거의 가지 않고 주말이면 집에서 잠만 잤다. 자주 꿈을 꾸고 자주 깨는 잠을 말이다. 불안이 끊임없이 불청객처럼 찾아왔는데, 그럴 때면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자물쇠가 없어서 손님처럼 찾아와 불안의 잔치를 벌이고 갔다.

어떤 날엔 허름한 빌라에 망가진 철문을 잠그지 못하고 잠을 자던 방에 내가 있었는데, 이름 모를 사람들이 자주 열린 문을 통해 나를 흘깃 쳐다보고 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어쩌다가 나는 이렇게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불안속에 살고 있는지 자책감이 쌓이는 날의 연속이었다.

누구도 내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계속 집에만 있었고, 계속 일만 하다가 집에 갔으니까. 계속 집에만 박혀 열심히 살지 않는 내 모습이 나조차도 싫으니까. 그 모습을, 나라는 사람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싫었으니까. 계속 동굴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한없이 동굴속으로 들어가던 어느 날, 뒤를 돌아보았는데 너무나 들어온 나머지 빛이 들어오지 않아 깜깜해서 진짜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든 날이 있었다.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었다. 울면 누군가 닦아줄 수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이 동굴 속에서 울음소리 마저 메아리처럼 내게 돌아와 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불안은 그렇게 몇개월동안 한집에서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역설적이게도 불안이라도 함께 해주었기에 죽지 않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 하게도 다시 불안을 조금씩 이겨내고 삶의 의지를 다지게 되는 계기는 누군가가 내게 일어서자고, 함께 나아가자고 일으켜세워준 날이 아니었다. 그냥, 충동적으로 밤을 지새우던 새벽에 꼬질꼬질한 채로 운동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나가 걷고 뛰던 순간에 나는 일어섰다.

영화 '동주'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진짜 부끄러운 것이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새벽 달리기를 통해 이따금씩 부끄러움을 마주하고 일어섰다. 만약 내가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물론, 요즘도 예전만큼 성실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성실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 큰 부끄러움이 되지는 않은 요즘이다. 나도 서른살이 넘으면서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까. 다른 성실함으로 살아갸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요즘 드는 생각은, 삶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라고 하는데, 나는 밀도 있는 삶의 방향을 찾아 가고 싶다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소중해서, 사사로운 것에도 감사할 수 있어서 작은 행복이라도 매일 조금씩, 아니 하나씩은 느끼면서 잠을 잘 수 있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두려워서 외로움에 사무치지 않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부끄러움을 자주 마주하기로 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다. 여전히 피곤하면 운동을 하러 나가지 않고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다가 내일을 맞이하는 사람일 때도 있다. 이 쉼이 불안했던 나는 더이상 불안하지 않고 이런 쉼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떤 선택을 하던 나의 결정에 자책하지 말고 후회하지 않기로 다짐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호감을 가져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시도해보기로 했다. 좋아한다는 것이 매일 매순간 행복할 수만은 없고, 가슴 아픈 날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더 좋은 것이 많을 것이라 믿기로 했다. 더 좋은 것이 많을 텐데, 마냥 두려워서 주저함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아쉽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낌없이 좋아하기 위해 다시 용기 있게 살아가려고 한다. 좋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려고 한다. 불안함이 설레임과 도전과 성취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다시 믿어보기로 한다. 앞으로 나는 몇번의 부끄러움을 더 맞이할지도 모르겠지만, 덜 부끄럽기 위해 걸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다시 열심히 살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자주 불안이 내게 찾아오더라도, 열심히 살아가다보면 그 어떤 무엇인가가 내게 올 것이다. 꿈이던, 행복이던, 사랑이던, 그 무엇이던, 간절히 바란다면 괜찮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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