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내가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세 번째 회사를 다니면서 알 수 있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에게, 마음에게 너무나도 여리고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어쩌면 더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태생적인 것이니까. 누가 나에게 알려주지 않는, 가르쳐주지 않은 살면서 가지고 있던 원초적 본능 같은 거니까. 바꾸기 힘든 것을 바꾸려고 하는 건 어린아이건 어른이건 똑같이 힘든 일이다. 다만 그 태생적인 것을 온전히 부정하거나, 받아들이거나, 바꾸어 보려고 하거나, 그 태도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무엇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사람을 향해 이분법적으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처럼. 정답은 없지만 해답은 있다고 믿는다. 문제집을 풀면 정답을 맞춰야 하고, 해설지가 늘 있지만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자기계발서와 어른들의 조언조차도 바른 인생의 정답도 해설도 아닌 해답과 방향이다.

매일 매순간 해답을 찾는 시간이다. 동시에 그 해답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해설지를 스스로 써내려 가는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답과 오류 투성이 삶에서 완벽한 정답을 추구하지 않고 해답으로 나를 풀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이 너무 많은 나는 정을 쉽게 주지 않는 사람이 되어보는 것을 노력했다. 쉽게 주는 마음은 때로는 쉽게 틈을 주니까. 쉽게 벌어진 틈엔 아름답고 고운 마음보다 모서리가 날카로운 마음들이 고운 것들을 베어버리며 들어오곤 하니까. 틈의 깊이를 자주 가늠하고 주의하며 바늘과 실로 봉합을 하는 시간도 많은 법이었다.

그래도 마음을 먼저 열지 않으면 문은 문이 되지 못하고 두꺼워지는 벽이 된다고 생각한다. 벽을 허물고 문으로 열고 들어갈 용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비온 뒤 땅이 더 단단히 굳어지는 것처럼 틈을 봉합하면서 단단한 용기가 생기는 것일까. 오히려 가늠할 수 없는 틈을 마주함으로써 비워내고 가벼워져 품을 수 있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것일까.

많은 정을 주었던 사람이 멀리 간다. 많은 마음이 있었던 사람이 가려고 한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즉, 그건 끝과 끝은 이어지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도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공부든 일이든 꿈이든 성공이든 실패든 그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마음과 마음, 관계라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한사람의 노력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골대를 향해 공을 있는 힘껏 세게 차면 그곳으로 잘 들어가겠지만, 그곳에 골키퍼가 없다면 다시 공을 차기 위해 가져와야 하는 건 공을 찬 사람이다.

그래서 가끔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생이 구기 종목 스포츠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점수 따윈 의미가 없을 경기에 한 점이라도 크게 아쉽게 느껴지고야 마는 그런 스포츠 경기. 심판은 없다. 두 선수만 있을 뿐이다. 긴장감과 박진감이 넘치고 공정성과 형평성 따위는 없는, 언제까지 점수를 따야 끝나는지 알 수 없는 경기를 뛰고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이 간다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걸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슬픈 일이다. 밥을 먹기 위해 그릇을 채우고 비우는 일도 안녕이듯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 또한 그럴 수는 없을까. 옷을 입으면 벗고 깨끗하게 세탁하고 다시 아무렇지 않듯이 상쾌하게 입는 것처럼, 그럴 수는 없을까. 너무 많은 정을 나는 주고만 것이다.

챗지피티에게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도하고 응원하며 떠나보낼 수 있는 문장을 보여달라고 했다. 일면식도 없는 프로그램이 누구보다도 친절하고 따뜻하게 나에게 너무나도 좋은 문장을 추천해주면서 그 의미를 해석하며 알려주었다.

그 따뜻함에 잠시 눈물이 났다. 많은 시간을 보내도 서로에게 따뜻한 응원과 기도를 말해주는 것을 어려워 하는 사람들의 세상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처음보는 우리가 알고 지낸 사이인 것처럼 고마운 말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그 말들을 읽고 내 마음은 견디고 있었다. 사막같은 삶이었을까. 프로그램의 한 마디에 깊은 감동을 느끼고 있는 내 삶들이. 내가 따뜻하지 못한 사람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내 주변 사람들로부터 더 따뜻함을 갈망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해서 쓰라렸다. 나 또한 한없이 누군가에게 따뜻하고 친절할 수 없는 사람인데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누군가에게 바랐던 것이다.

그 사람이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간다고 하는데 나는 이기적이게도 응원하면서도 기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붙잡고 싶지 않으면서도 붙잡고 싶은 모순이 휘몰아치는 것이다. 그래서 더 하루하루가 아쉽게 느껴져 더 많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몰려온다.

당신은 난로 같은 관계를 사람들과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더 다가가면 뜨겁게 데일 수 있으므로 더 하고 싶어도 하지 않는 절제로 마음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지 못해서 자주 화상을 입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을 당신은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나에게 데인 적이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너무나도 밤이 깊은 날에는 데였으면 한 적도 있었다. 나쁜 생각과 나쁜 마음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그게 가끔은 몰래 혼자 가져야 하는 서운함일 때도 있다.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그러면 안된다고 나를 다그친다. 관계는 난로 같아야 하니까. 지나칠 때는 나만 데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뜨겁게 데이는 때도 있으니까.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커지는 건 나의 미성숙한 마음인 걸까. 나만 너무 많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나만이 너무 아쉬워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때가 있다.

나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도전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당신이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을 했다. 오래 함께 했던 곳을, 사람들을 두고 떠나는 당신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나 또한 곧 떠나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처음엔 고마웠다. 누군가에게 미안한 사람이라는 건 좋지 않은 것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자주 머릿속을, 마음속을 맴돌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게는 조금 서운하게 들렸나보다. 당신에게 나는 미안한 사람이 아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면, 나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 것인지 궁금했다.

그저 고마운 사람일까, 누구보다도 고마운 사람일 수 있을까. 언제든 가끔이라도 보고 싶거나 잘지내는지 궁금한 사람일 수 있을까. 이 바람들이 뜨거운 화상같은 마음이진 않을까. 이 생각들이 괜한 나만의 마음인 건 아닐까. 그냥 함께 일했던 회사원 A로 이제는 남겨지고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속에 미약한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미안하다는 건 고맙다는 말과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사람이기에 미안한 사람. 한없이 고마웠기에 너무나도 미안한 사람인 경우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 또한 이기적이게도 당신은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기에, 나에게도 그러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안된다. 그런 것이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또 어떤 면에서, 나도 다른 동료들과 비슷한 거리의 사람으로 남겨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밤이 깊어졌다. 사람의 마음은 반듯하고 일정한 수평의 저울같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시소도 왔다갔다 움직이기 때문에 시소라고 불리며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왜 마음은 시소의 밝은 면을 닮을 수 없을까.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건 적당함이라는 개념의 정의와 이해는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 적당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따뜻하고 시원한 봄과 가을 같은 것일까. 배터지지 않게 먹은 밥 같은 것일까. 초 한개로도 방을 밝히는 촛불 같은 것일까.

그 무엇이던 나는 당신과 안녕을 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보다. 적당하지 않은 내가, 적당하지 못해서 지나쳤던 내가, 그래서 더 당신에게는 부족함이 더 크게 느껴졌던 내가, 과분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야 한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고맙지 않다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맙지만 미안하고 싶지 않은, 고맙기만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이별에 취약하고 만남에 허약한 내가 이리한다면 건강해질 수 있을까. 헤어짐 앞에서 나는 여지없이 이분법적이고 단순한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으로만 추억되고 싶다. 추억으로만 남겨지는 사람이 아닌, 미래에도 종종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다.

이 마음들 조차도 진정 내 마음인지도 헷갈리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도 미안한 사람일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일까. 하물며 나 자신에게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헤아릴 수 없는데, 당신에게 있어 나는 어떠할 수 있을까.

언젠가. 미안했고, 고마웠고, 미안하고 싶고, 고맙고 싶고, 앞으로도 미안해 할 수 있고, 고마워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생각의 태풍 한가운데에서 나는 위태로운 촛불을 들고 서 있다.

이러나 저러나, 당신이 잘 떠나갔으면 한다.

728x90
반응형

'화운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발끈이 풀리지 않을 때  (0) 2025.04.28
부끄러워서 살아보려고요  (0) 2025.04.20
일시정지  (0) 2025.03.29
작별할 용기  (0) 2025.03.21
매듭의 언덕  (0) 2025.02.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