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수박이 과일가게를 지키고 있다두드리면 맛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허술하게 메아리 치는 수박을 샀다매미가 늦여름을 쫒던 울음을 닮았다나는 어느 곳을 두드리면 싱그러운 소리가 날까검정색 줄무늬가 너무나 선명해서 지우고 싶었다철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있는 힘껏 닦았다두꺼운 껍질에 깊이 새겨진 문신이 잘지워지지 않는다검은 새벽들을 수놓은 수박의 시간은 달다나의 지울 수 없는 흉터도 단맛을 낼 수 있을까새빨간 과육이 드러날 때까지 씻었다아무도 내게 왜 철수세미와 세제로 닦았는지 묻지 않는다가려보아도 드러나는 것은 선명해져 갈 뿐이다수박을 씻는 시간에도 무늬는 더 짙어지고 있었다어디까지 씻어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쌓인다
육중한 쇳덩이가 창공을 날아간다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구름에 닿을 수 있다구름속이 아늑하다고 너는 말할까날개를 접고 다리로 하늘을 걸어간다면새는 완벽한 비행을 할 수 있을까나의 날개뼈는 욱씬거리고 하늘은 높다네가 남긴 비행운을 걸어본다떨어지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도깃털 하나 없는 날개가 슬프지 않는 것도네 발자취를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구름이 솜털처럼 짧고 여려 오래 걷지 못해도괜찮을 수 있다. 너의 비행이 자유로우므로두팔을 벌려 날갯짓을 할 것이다비행기도 힘차게 달려 날아갔으니저 구름은 너와 함께 걷고 싶은 길이다너는 그렇게 아름답게 날아다오
태어난 모든 것들은 끝이 있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끝에 도달하기 전에 끊어지다가도 이어짐을 반복한다. 깔끔하게 잘린 것들은 대체로 가장 예리한 날에 베여 미련이 없어 보인다. 막무가내의 힘으로 끊어진 또 어떤 것들은 거칠은 단면을 드러내며 서러워 한다.연필깎기로 돌려 예리하고 반듯하게 잘린 몽당연필. 구멍난 옷감을 덮기 위해 바늘구멍 속 좁은세상을 돌파해야 하는 잘린 실. 체하지 않고 잘 소화시키기 위해 작아지는 식재료들. 깨지면 이어붙여도 물이 새어 나오고야 마는 유리병. 불규칙적인 모양으로 잘게 부스러져 다시 모이지 않는 과자 부스러기.나는 끊어진 것들의 본래 이어지거나 합쳐진 과거의 모습들을 상상한다. 제를 지낸다. 통곡하지 않는다. 소리 내지 않는다. 그저 깨지고 잘리고 부서져야 했을 마음을 이..
구름으로 베개 싸움을 하는가 봅니다모든 것을 재우려듯 내려 감싸주는 눈입니다깊숙이 남겨진 발자국들도 새살이 돋습니다고드름이 거꾸로 자란 이들도눈에 파묻혀 누군가의 품을 떠올리겠습니다이 모든 하얀 숨들을 받아들이면나는 어떤 모양의 눈사람이 될 수 있을지요누가 나의 눈코입과 팔을 만들어줄 것인지요자주 지나간 길엔 진갈색의 눈이 땅을 닮았습니다나는 아직 가야할 길이 많아 하얀 사람일까요나의 가장 추운 곳에 발자국을남기고 간 이들이 있지요자주 밟혀 흙투성이의 눈이 얼룩진 곳이 있지요유독 그런 땅에 봄은 늦잠을 잡니다녹을줄도 모르고 하얗게 덮일줄도 모르고
파도의 손톱이 쉼없이 육지를 긁습니다요란하게 모래알들을 할퀴고부드럽게 젖은 것들을 감싸는 손톱단단해진다는 건 손톱을 깎는 일조개껍질처럼 시간을 견고히 쌓는 일세상은 가려운 곳이 많은가 봅니다아름다움은 긁히고 어루만지는 것일까요나의 간질거림은 무엇일까요내 손톱은 통증도 울음도 없이나를 속이며 몰래 자라고 있습니다제각각으로 손끝에 쌓이는 시간으로무심코 긁으면 붉은 해변을 만들고가끔은, 아니 자주 여린 땅이 되곤 합니다손톱을 다듬어야 하겠습니다하얀 초승달을 손끝에 띄우는 마음으로생채기가 아닌 별들을 수놓는 시간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