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밥집에 들러 빼곡한 메뉴판을 본다
대부분의 음식들을 여기서 먹을 수 있지만
늘 먹는 건 가장 보통의 김밥 뿐이다
열가지가 넘는 종류이지만 그냥 김밥을 응원한다
참치김밥 소세지김밥 누드김밥
어묵김밥 돈까스김밥 치즈김밥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천하무적의 그냥 그런 존재
그래서 그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는 단단함
거추장스런 포장지도 필요없는 순수함
어느 김밥집을 가던 단무지는 빼달라고 말한다
한입 베어 물면 기둥이 바스러지듯 소리가 난다
오랜시간 물든 노오란 혈류를 쏟아내며 운다
적막할때 자주 먹는 김밥이니까 소리마저 삼킨다
김밥속 재료들은 어울리고 있는 걸까
김과 밥때문에 어울려져 있는 걸까
유난히 단맛의 주장이 강한 단무지가 미워진다
어떤 날엔 괜히 잘 말린 김밥을 해체한다
하나씩 속재료를 맛보며 해부하고 해석한다
이따금씩 옆구리 터진 김밥에서 나를 본다
같은 맛이지만 팔리지 않는 김밥의 생은
참기름이 없어 고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메뉴판에서 어디에 누워있는지
어떤 김밥이기에 속마음은 떫은 맛인지
단무지는 항우울제 같아서 빼고 먹어보면
가장 복잡해서 조화롭지 못한 맛이 난다
참기름으로도 감출 수 없는 맛을 먹을 이는 없다
옆구리가 터지지 않아도 팔리지 않을 것이다
누드김밥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드러낼 수 없으므로
집집마다 일반김밥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그냥김밥 보통김밥 야채김밥
나는 네게 이름을 지어줄 수 없다
단무지가 없으면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구석에서 김밥 한줄로 끼니를 떼우는 이가 있다
그의 건너편에 앉아 김밥 한줄을 함께 먹는다
각자 먹을 양이 정해져 있다는 게 위안이 된다
마음은 정량이 없으니까 옆구리가 터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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